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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설픈 자기애 대신 당당한 자존감 회복하기

김희수 박사(한세대학교 교수)
2020-10-14


 

 

 

김희수 박사

한세대학교 교수

한국상담학회 부회장

 

 시인이자 가수인 하덕규 씨의 노래 중 기억이 남는 곡으로 <가시나무>라는 노래가 있다. 자기애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가사여서 소개한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물론 우리들 모두가 자기애에 빠져 있는 나르시스는 아니다. 자기에게 반해 물에 빠져죽는 나르시즘이 우리들 모두에게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기애적 성향이 있다. 혹시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은 내가 너무 대단해서 나를 질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전형적인 자기애에 빠진 사람이다. 주변 사람들과 어울릴 때 항상 이야기의 중심에 서려고 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하고, 대단한 사람으로 여기는 사람이 있는가. 그와 만나고 헤어졌을 때, 공감을 받았거나 상대방과 정서적으로 교감을 느끼지 못했다면, 그저 그 사람의 자랑을 듣다가 헤어진 느낌이 든다면, 그 상대방은 자기애에 빠진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어린 왕자>에 나오는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 살고 있는 별을 방문한 어린 왕자가 했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어린 왕자는 순순한 영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아저씨가 원한다면 계속해서 아저씨의 인사법을 감탄해줄 수 있고, 계속해서 열렬한 박수를 기꺼이 보내줄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왕자는 그 아저씨에 대해 비난하지는 않았다. 다만 참 이상한 아저씨야라는 말을 남기고, 그 별을 떠나게 된다.

 

 어린 왕자는 아주 작은 별에 살면서 쓸쓸할 때는 의자를 앞으로 땡겨 해가 지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어떤 날은 수십번 의자를 땡겨 노을을 바라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잘난척하는 장미를 두고, 친구를 만나러 여행을 떠난다. 남겨진 장미가 슬프지 않은 척 무심하게 이별을 견뎌낸 것과 친구가 왔는데도 친구를 만나기보다 자기의 모습에 빠져있던 허영심이 많은 사람은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외로움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을 수도 있다.

 

 자기애는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지 않고 교류해주지 않지만, 자기를 자신만이라도 사랑하려고 하는 집착이 낳은 모순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고립과 외로움을 인정하고, 관심을 세상에 좀 둘 수 있어야만 건강하고 안정된 자기가 완성될 수 있다.

 

 자기애에 빠지면, 진정 나를 사랑할 사람을 만들기가 어렵다. 자기에게 아부하고 환심을 사려는 사람에게 이용당하기 쉽고, 자신을 평범하게 진정으로 돌봐줄 수 있는 친구를 잃게도 된다. 인간은 실존적으로 외롭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혼자이다. 그러나 주변에 외로운 인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면서 외로움을 해소해볼 수 있다.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으면 그런 위로의 경험을 할 수 없기 때문에 참 안타까운 것 같다. 어린 왕자의 반응처럼 당신에게 찾아 온 보물과 같은 사람들이 참 이상한 사람이야.’하고 당신을 떠나버린다면 당신은 더 분주히 자신이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려고 애쓰겠지만, 그 노력을 인정해줄 사람이 없어서, 또 더 노력하는 악순환의 늪에 빠질 수 있다.

 

 아들러(A.Adler)는 인간은 열등감에 빠지기 쉬우며, 열등감 때문에 우월성을 추구하려고 하고, 그래서 성실하고 열심히 세상을 살 동기를 획득할 수 있다고 하여, 열등감의 긍정적 속성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열등감을 극복하지 못한 누군가는 병적 우월성을 추구하게 된다. 그것이 자기애의 모습과 닮아 있을 수 있다.

 

 또 아들러는 심리적으로 건강한 사람은 열등감을 극복하고 일, 사랑, 우정을 성공적으로 누린다고 하였다. 열등감을 극복해야만 일을 할 수 있는 에너지도 생기고, 타인에 대한 나눔과 배려를 할 수 있다. 그렇게 살 때 사회적으로 유용한 인간이 될 수 있다고 하였다. 당신은 일을 여유 있는 마음으로 해낼 수 있는가? 그리고 당신은 우정을 건강하게 누리고 있는가? 당신은 사랑을 건강하게 하고 있는가? 일과 사랑과 우정에 집착하지만, 그 일과 사랑과 우정의 끝이 실패로 끝나고 있다면, 당신은 자기애를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닐지 한 번 검토해보자. 당신은 자신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했는지 한 번 분석해 보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당신,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나 혼자만의 휴식이지 모르겠다. 뜨거운 햇볕은 온전히 참아내며 노동하여야 할 우리의 삶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러나 뜨거운 한낮의 햇볕에 농부들은 일손을 멈추고, 그늘에서 한 숨 낮잠을 자기도 한다. 혹은 집으로 돌아와 점심을 먹고, 한낮의 태양을 피한다. 그것이 삶의 지혜라고 생각한다. 남을 의식하면서 쉬지 않고 노력하는 것은 극도의 피로감을 줄 수 있다.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 혼자만의 휴식이 필요하다. 그러한 휴식에서 내면에서 들리는 욕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다. 그러한 욕구를 충족하다 보면, 타인에게 나의 가치를 알리기 위한 소모적인 활동을 많이 줄일 수 있다.

 

 젊은 시절 보았던 캐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춤을> 이라는 미국 영화에 인디언들의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에 아직 남아 있다. 여자 주인공은 영어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인디언이었는데, 주인공과 인디언 부족을 연결해주고, 미국인인 주인공과 사랑에 빠진다. 그 여인의 이름은 주먹 쥐고 일어서였다. 그 여인이 어린 시절 친구들의 놀림을 극복하기 위해 주먹을 쥐고 일어서는 모습이 강렬하게 남아서 부족의 어른이 지어준 이름이었다고 설명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인디언들의 작명법이 매우 재미있기도 했고, 그러한 이름을 가지고 산다면, 우리들은 참으로 인생의 소용돌이에 힘있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당신은 인생의 찬 바람을 온통 견디며, 어두운 겨울 들판을 온전히 걸어서 건너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고등학교 동창들과 겨울 산행을 했던 때를 간혹 떠올려 본다. 학력고사를 마친 그 겨울 우리반 친구들 7명이 강원도에 놀러 갔을 때였다. 산행은 처음이었던 우리들이 아무 생각 없이, 냉동 만두 한 봉투와 지금은 잘 사용하지 않는 버너와 코펠을 챙겨서 산을 걸어 올라갔었다. 우리들은 통제 구역이라는 팻말을 못보고 지나쳤고, 무심히 올라가다가 눈을 만나게 되었다. 계속 눈은 내렸고, 쌓이는 눈에 가려져 등산로를 확인할 수가 없게 되었었다. 오전 11시쯤 출발한 우리들은 2시 쯤 냉동만두를 끓여 먹었다. 눈을 퍼서 끓일 때의 즐거움이 지금도 생생했다. 눈은 녹으면 얼마 되지 않았기에 우리는 여러 번 냄비로 눈을 퍼 담아서야 만두가 잠길 정도의 물을 확보할 수가 있었고, 만둣국도 아니고, 터진 만두죽처럼 된 음식을 먹으면서 재미있어 했다. 일곱명의 여자 아이들이 겁에 질린 것은 4시 이후였던 것 같다. 생각해보니 우리들이 산행을 시작하고 나서 단 한 명의 사람도 만나지 못했고, 우리들은 같은 곳을 뱅뱅돌고 있었던 것이다. 아이들의 얼굴에는 웃음이 없어지고, 점차 힘들어졌었다. 온통 눈이었던 그 산행에서 우리는 앉을 수가 없었다. 앉으면 엉덩이가 젖을 것이고, 젖으면 몸이 얼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무에 기대어 쉬다가 걷기를 반복하면서, 우리들은 몹시 피곤하였었다. 그 나마 체력이 제일 낫다는 나는 맨 뒤를 책임지기로 하였었다. 맨 뒤에서 따라가며 보는 겨울 눈은 마력이 있었다. 피곤한 다리로 하늘과 설산을 보고 있으면, 악마의 음성이 여기서 쉬었다 가. 누우면 너무 편안할 거야. 차갑지 않아. 아주 따스할 걸. 눈이 솜이불 같이 생겼잖아. 누워봐.” 라고 말하면서 자꾸 나를 유혹하는 것 같았다. 나는 진심으로 누워서 쉬고 싶었고, 그래서 사람들이 이러다 죽을 수 있구나하는 것을 그 날 절실하게 이해했다. 그래도 나는 아이들과 보폭을 멀리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고, 산골에 살고 계시던 아젔가 우연히 지나가다가, 우리를 발견하고야 위험한 산행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아저씨는 통제구역을 눈이 오는데 왜 들어왔냐고 야단을 쳤었다. 우리는 그 말을 듣고야 왜 하루 종일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는지 알 수 있었다. 산을 내려왔을 때는 완전히 어두웠고, 우리는 정말 추위와 배고픔으로 거지가 따로 없었다. 나는 이 산행을 가끔 떠올린다. 그날 눈의 유혹도 잊을 수 없고, 살면서 왜 사람이 필요한지도 가장 잘 알 수 있었던 날이었다.

 

 우리는 실존적으로 혼자 이 세상에 왔다가, 혼자 이 세상을 떠나야 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내 고통을 함께 할 친구도, 우연히 지나가다 나를 도와 줄 사람도 필요하다. 우리가 항상 남을 도와줄 수는 없다. 그러나 가능하면 열심히 서로 도움을 주고 받고 사는 인생이 훨씬 좋다. 자기애에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도 이것이다.

 

 당신이 자기애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못하고 있다면, 계속해서 다른 사람에게 무심하고, 자신의 진짜 감정에도 무심한 채로 삶을 바꾸어 보기를 바란다. 게다가 자신이 상처가 없고 세상에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 말자. 자기애가 보여주는 무심함은 사람들에게 반감을 준다. 그리고 자기애자들은 외롭게 주변인이 될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가 아닌가. 주인공이라고 주장하는 자기애자들이 영원한 주변인이 되고 있는 현실이.

 

 소심하지만 아름다운 그대여. 주먹 쥐고 일어서자. 누구나 상처가 있다. 상처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상처는 있다. 상처는 주먹 쥐고 일어나서 그곳을 벗어나야지만 상처의 치유가 시작된다. 상처가 남아서 과거를 떠올린들 상처 속에 주저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 이제 일어나자. 그만.

 

<김희수(2017). 중년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다 중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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