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봄이 되면 길을 걷다가, 설거지를 하다가도 잘 살고 있을지, 안부가 궁금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첫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내담자 이야기입니다.(내담자 보호를 위해 사례의 내용은 각색되었습니다.)

새 학기를 시작하면서 상담을 신청한 내담자는 학사 경고를 받은 이후로 우울과 불안이 심해서 일상생활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이 내담자의 우울은 죄책감에서 기인했는데, 유독 가족의 이야기를 힘들어하고 무언가를 감추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1년 정도 상담을 진행되었을 때, 우연히 내담자의 손목에서 자해의 흔적을 보게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내담자는 더운 여름에도 에어콘을 핑계로 긴 옷을 입고 상담에 왔는데, 자해의 흔적이 들킬까봐 그런 것이었습니다. 처음 내담자가 자해를 한 것은 부모님이 이혼하신다는 사실을 들은 직후였는데, 엄마는 “집에 반창고 없으니 내일 양호실에서 치료해”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화가나거나 슬플 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조절하며 손목을 그어왔고, 죽고 싶지만 죽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대답하던 내담자의 무력한 얼굴이 또렷하게 기억납니다.

이 사건 이후 내담자는 오랜 시간 굳게 믿고 있다는 사실을 어렵게 털어 놓았습니다. 부모님의 이혼의 이유가 자신이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사실을 말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초등학생이던 내담자를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수차례 강간했던 삼촌은 실형을 살게 되었고, 이 일로 인해 부모님의 갈등이 심해지게 됩니다. 부모님은 이러한 가족의 일은 ‘절대 말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가르쳤고, 상담에서도 이 이야기를 다루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것도 자신의 탓이었고, 부모님이 이혼을 한 것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내담자의 죄책감에 대해 가족 체계 내에서 경험했던 관계적 역동을 성찰하는 것은 상담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담자의 부모님은 다툴 때마다 내담자를 통해 의사소통을 했고, 그 과정에서 내담자는 부모님의 갈등을 중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신이 갈등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죄책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한 부모님의 대화 속에서 삼촌과 둘만 있는 상황을 만들었던 것, 처음 당했을 때 빨리 이야기하지 못해서 3년 동안 지속적으로 성폭행은 당한 것도 자신의 잘못이라고 내면화하게 되었고, 학사 경고로 또 다시 가족의 갈등이 시작되면서 죄책감이 극대화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대학 인권센터 성평등상담실에서 인권, 성폭력과 관련된 문제를 상담합니다. 성폭력, 가정폭력은 대표적인 젠더기반폭력이자 인권 침해 사례로, 가족 체계적 접근을 통해 문제의 원인이 당사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가족 관계와 가족 구조에 있을 수도 있다고 접근하는 것은 피해-가해 구도를 벗어난 상담을 가능하게 합니다. 또한 생태체계론적 접근을 기반으로 가족과 사회체계 간의 상호작용을 성찰하는 것은 피해자를 비난하고, 가해자를 옹호하는 2차 피해의 문화와 내담자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역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됩니다.

대학 내 상담센터와는 달리, 저희 인권과 성평등의 문제로 상담을 찾는 학생들은 보다 실천적인 해결책을 얻기 원합니다. 어떻게 보호받을 수 있으며, 어떻게 대처할 수 있을지 알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보호와 대처의 과정 속에서 때로는 사회적 무력감을 경험합니다. 아주 오랜 시간 견고하게 존속되어 온 통념이나 관행, 억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내담자의 선택을 지지할 수 있는 보호 장치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때때로 그렇게 될 수 있는 변화를 모색하고, 트라우마를 야기하는 사회, 문화적 구조로부터 내담자를 보호하는 것이 상담자의 책무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2018년, 미투 운동을 시작으로 우리 사회에서 성폭력 피해자들의 경험이 이야기되고, 사회가 그 경험을 경청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성폭력 생존의 이야기는 상담실 안에서만 털어놓을 수 있었던 개인적 이야기, 개인적 회복을 넘어 사회의 이야기로, 사회적 변화를 모색하는 움직임이 되었습니다. 라인홀드 니부어는 1932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는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을 비교하며, 개인의 변화가 사회의 변화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오히려 비도덕적 문화와 사회구조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사회 문화적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건강한 가족 구조가 개인의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건강한 사회 구조가 선행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의 문제는 또 다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상담을 통해 내담자가 건강하게 회복되는 것을 도와주는 것은 물론, 또 다른 피해가 생기지 않을 수 있도록 보호와 구제의 방법을 모색함으로써 건강한 사회 구조로의 변화가 시작되기를 바랍니다. 상담실에서 경청하고 공감했던 내담자의 이야기에 연대하고, 지지하면서 내담자의 무력한 얼굴에도 어렵게 피어난 웃음이 오래 오래 지속될 수 있도록 지켜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