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정신분석 훈련을 받을 당시, 결혼 후 미국에 이민 온 한 한국 여성이 나를 찾아왔다. 가족의 빚을 청산하기 위해 고된 삶을 살았고 은퇴할 무렵이 되어서 상담을 받으러 왔다. 남편과 함께 미국에 이민을 왔을 때는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있었다. 남편은 미국에서 이름만 대면 모두가 다 아는 직장에 고용이 되었고 매달 직장에서 받는 월급으로 미국에서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남편은 욕심을 냈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세탁소를 운영하기로 결정했다. 이를 위해 가장 좋은 고가의 세탁기계를 구입했고 부푼 기대와 꿈을 안고 세탁소를 경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기대와는 달리 세탁소의 경영은 어려웠고 결국 세탁소는 큰 부채를 안고 문을 닫게 되었다.

변호사는 그 여성에게 이혼할 것을 충고해 주었다. 남편의 빚을 지고 살게 되면 평생 고통 속에 살게 될 것이라고 그 변호사는 그녀에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그 부인은 자신의 남편을 쉽게 내칠 수 없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그녀는 미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간호학과를 졸업한 그녀는 미국 병원에서 허드레 일을 하면서 조금씩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정신병동에서 일을 할 때는 온갖 수모를 경험하기도 했다. 분열증을 앓고 있는 환자가 병실 복도에 흘린 배변을 치워야 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경험할 수 있는 고통스런 일들을 감내하며 빚을 갚기 시작했던 그녀는 어느 덧 환갑이 훌쩍 넘어 버렸고, 세탁소 파산으로 인해 생겨난 빚을 거의 다 갚게 되었다.

그렇게 가족을 지키기 위해 정신없이 살아온 탓에 그녀는 다른 의미에서 가족을 돌보기 어려웠다. 그녀는 지난 이십여 년의 세월을 빚을 갚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 긴장과 불안으로 인해 자녀들을 안정적으로 돌보지 못했다. 그녀는 가족에 대한 죄책감, 지난 세월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을 느끼며, 상담을 받기 위해 필자를 찾아왔다. 뉴저지 주에서 뉴욕 맨하튼까지 기차를 타고 매주 빠짐없이 두 시간의 시간을 들여 필자에게 상담을 받기 위해 왔다. 어느 날, 그녀는 흥분된 기분으로 상담실을 걸어 들어왔다. 필자는 마치 그녀가 20대의 소녀가 된 듯 느껴졌다. 때는 4월 무렵이었다. 그녀는 상담실에 들어오면서 들뜬 기분으로 이렇게 이야기했다. “뉴저지에서 기차를 타고 오는데 꼭 아버지께 가는 길 같았어요.” 뉴욕으로 오는 기찻길에는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 있었고, 그 기찻길은 벚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그녀의 유년시절 고향을 연상시켰다.

필자는 그 느낌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학에 실패했고 재수를 해야만 했다. 결국 어렵게 공부를 해서 그녀는 한국의 최고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대학의 첫 학기, 그녀는 너무 공부하기 싫었고 힘들었다. 그리고 어려운 결심을 하고 시골에 계시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했다. “아빠, 나 공부하기 싫어. 집에 가고 싶어.” 어려운 살림형편에 겨우 등록금을 마련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반응이 두렵기만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른 말씀이 없으시고 이렇게 이야기하셨다고 한다. “딸아! 마, 됐다. 내려 오거라. 집에서 좀 쉬어라. 내는 니 하나면 된다.” 그녀는 아버지의 그 한마디에 가벼운 발걸음으로 공부의 시름을 잊고 고향으로 한숨에 달려갔다. 그녀가 내려야 할 고향의 역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기차역에서 그녀를 기다리시는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그녀는 상담자를 기차역에서 딸을 기다리셨던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었다. 먼 이국땅에서 숱한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던 그녀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안 계셨다. “그 동안 먼 이국 땅에서 빚을 갚느라고 참 수고 많았구나, 참 고생했어”라고 이야기해줄 아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고향 역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아버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기다림의 역할을 상담자인 필자에게 옮겨 놓았다. 상담이 끝날 무렵 필자는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참 수고하셨어요. 이제는 시름을 내려놓고 좀 쉬세요.” 만약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아버지가 하셨을 말을 상담자인 필자는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러자 그녀는 한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마치 고향에서 그녀를 기다렸던 아버지에게 위로의 말을 들은 듯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필자는 상담에서 기다림의 주제를 자주 경험한다. 기다림의 주제는 상담자에게 익숙하다. 상담 시간 늘 지각하며 날 기다리게 한 내담자, 나의 섣부른 해석에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는 내담자... 상담자는 기다린다. 상담자는 내담자가 상처받은 마음에서 회복되기를 또한 기다린다. 문제를 가진 부부와 가족이 그 문제를 인식하고 아름답게 가족을 가꿔갈 수 있기를 상담자는 기다린다. 우리 생각처럼 인생이 흘러가지 못할 때가 있다. 우리의 생각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말하지도 행동하지도 못한다. 우리의 자녀들은 우리의 기대와 생각에서 어긋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그 기다림과 인내가 변화를 일으키며 생명력을 불러일으킨다. 상담자인 필자는 그렇게 오늘도 기다리고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