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11월. 오늘 이 비가 그치면 겨울이 성큼 다가올 것이라고들 했다. 11월이 되면 생각나는 분이 있다. 김 할머니! 할머니는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난 분이다.

김 할머니는 평생 두 가지 소원이 있다고 했다. 하나는 글을 읽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대통령 선거 날에 투표하는 것이었다. 이제 할머니는 적어도 당신의 이름 석 자를 직접 쓰시며 사인(sign)을 하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바마가 처음으로 대통령 되던 날! 그날은 가을 단풍이 한창인 날이었다. 글을 읽지 못해 시민권 공부도 할 수 없었던 할머니에게는 당연히 투표권이 없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평생소원인 대통령(선거) 투표 한 번을 하시겠다고 무작정 내게 함께 가자고 하셨다. 두세 번 설득해 보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그저 아름다운 가을 길을 함께 걸어 보자는 마음으로 투표장에 간 적이 있다. 길을 걷는 동안 혹여 마음을 돌리시려나 했지만 할머니의 걸음은 더욱 힘차고 빨라졌다. 막상 투표장에 가니 과연 이 난관을 어찌 돌파할까 막막하기만 했다. 일단 신분확인 하는 곳에 가서 할머니의 소원을 설명했다. 그러자 선거관리인은 활짝 웃으며 투표인 명부에서 있지도 않은 할머니 이름을 찾는 척하고 “미세스 김, 여기 확인했습니다. 들어가시지요!” 했다. 그 다음 단계에 가서도 같은 설명을 하고 넘어갔다. 그러자 기적같이 어린이들을 위한 모의 투표소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의 투표소에 있던 자원 봉사자들 역시 격려와 응원을 보내 주어서 나와 할머니는 무사히 투표를 마치고 나올 수 있었다. “I vote” 스티커를 자랑스럽게 붙이고 나온 김 할머니. 할머니와 나는 가을 햇살에 유난히도 반짝이던 단풍 빛 길을 되돌아 왔다.

11월이 되고 기온이 내려가면 불우이웃 돕기 캠페인이 벌어진다. 연말에만 반짝하고 불우이웃을 생각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했지만 연말마저도 생각할 여력 없이 떠밀려 사는 것 같은 세상이기도 하다. 그 해에도 내가 일하던 기관에서는 불우 이웃 돕기 동전모금(Penny Drive)에 나섰다. 우리에게는 집에 굴러다니는 동전, 특히 일전짜리 페니라도 모으면 십시일반, 불우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을 모았다. 사무실에는 동전 모이는 정도를 누구나 볼 수 있게 큼지막한 유리병이 준비되었다. “주르륵 주르륵..” 동전 쏟는 소리가 경쾌하게 이어지더니 며칠 못가 또 다른 병을 준비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할머니가 작은 손가방을 무겁게 들고 오셨다.

“이것이 뭔지 맞추어 보시겠소?”

“음~ 무거워 보이는데요. 혹시 동전 모으신 거예요?”

“맞았어. 동전이야. 동전 모은다면서 잘 되가시우?”

“네 잘 되갑니다. 집에서 굴러다니는 동전을 모아 어려운 형편에 있는 사람을 돕자고 들 하셨지요.” 나는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 지금 집에 굴러다니는 돈이라고 했수?”

“네~ 우리에게는 별 필요 없지만 이런 것도 모이면 불우이웃을 돕는데 쓰일 수 있지요.”

가방 속의 할머니의 동전이 내게 힘을 더하는 것 같았다.

순간, 할머니는 언성을 높이셨다.

“난 그렇게 못하오. 그 사람들도 하나님의 자녀들이오. 어찌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돈으로 좋은 일을 한단 말이오?”

감을 잡지 못해 어리둥절한 나는 어느 샌가 눈물로 젖은 할머니의 모습에 더욱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좋은 일을 하는 데는 정성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오!”

할머니가 내민 손가방에는 방금 은행에서 바꾸어 오신 일전짜리 페니 두루마기 20개가 들어 있었다.

로저스는 상담사의 자질에서 공감, 존중, 진솔을 외쳤다. 물론 김 할머니는 프로이드도 모르고 로저스도 모르신다. 하지만 그 어떤 조건이나 형편도 인간의 존엄성에는 태클 걸 수 없음을 선포하신 분이시다. 사람은 변하기 힘들다고 하지만 진심을 공감하고 존중할 때 기적은 일어난다.

삶의 문제에 지쳐서 상담실을 찾은 내담자들, 상담자로서 나는 그들의 원가족을 분석하고 성격을 분석하며 문제의 원인을 찾아가고 역기능에 방점을 찍곤 한다. 하지만 이때 자칫하면 문제만 보다가 내담자를 향해 “굴러다니는 동전”의 자세를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야겠다. 내담자의 아픔을 공감하고, 고통과 싸우는 그들의 모습을 존중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함께 걸어가고 싶은 11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