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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하면 충분한 나 그리고 상담자 

정여주 자격검정위원장
2017-02-20

얼마 전 6살이 된 첫째 아들의 새 운동화를 사러 갔다. 아이는 가게에 진열된 신발들을 한참 둘러보더니 유명한 슈퍼히어로 디자인에 불빛이 번쩍번쩍 하는 멋진 신발을 마음에 들어했다. 디자인은 골랐으니 다음은 아이의 발에 맞는 신발사이즈를 주문하면 되었다. 그런데 한창 성장기에 있는 아이인지라 발도 금방 자랄 것이라 생각해 아이 발보다 한 치수 큰 200mm의 신발을 사가지고 왔다. 그런데 다음날 어린이집에 다녀온 아이는 울상이 되었다. 빛이 번쩍거리는 그 화려한 신발은 너무 무거워서 친구들과 달릴 때 불편했고, 사이즈도 너무 커서 신발이 자꾸 벗겨진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혼자서 신고 벗기도 불편해했다. 기왕 새 신발을 샀으니 그 신발에 어떻게든 아이를 적응시켜 보려고 했지만, 결국 일주일 후 아이를 데리고 다시 신발가게에 갔다. 이번에는 유명 슈퍼히어로 디자인이 아닌, 끈도 찍찍이도 없으며, 아이의 발 사이즈에 딱 맞는 신발을 골랐다. 제 발에 꼭 맞는 편안한 신발을 신고 놀이터에서 신나게 뛰어다니는 아이를 바라보니 비로소 내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 일로 인해 문득 내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게 되었다.

상담자나 부모를 대상으로 강의할 때, 이만하면 ‘충분한(good enough) 엄마’, ‘이만하면 충분한 상담자’에 대한 얘기를 자주 하게 된다. 그런데 계속해서 느껴지는 것은 이만하면 충분한 엄마나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내 자신에 대해서 ‘이만하면 충분한 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참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데 이전에 나에게 열심을 다하게 한 동력은 ‘이만하면 충분한 나’가 아니라 다른데 있었던 것 같다. 내 어렸을 적 일기장에 이런 문장들이 무수히 적혀있다. ‘난 왜 ***처럼 예쁘게 태어나지 못했을까?’, ‘난 왜 ***처럼 남자애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을까?’, ‘난 친구들 앞에서 발표도 너무 못해’, ‘난 내 동생보다 머리가 나빠’, ‘난 성격도 착하지 않아.’ 이런 자기비난의 목소리들 뒤에는 늘 ‘그러니까 공부라도 잘해야 내가 살아갈 수 있겠구나. 열심히 공부하자.’라는 내용이 뒤따랐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했다. 하지만 그 공부가 행복하지 않았고, 늘 우울했으며, 무언가 내 자신의 본 모습에서 멀어져 가게 되었다. 얼마 전 당시 동창들을 만날 기회가 생겼는데, 그 친구들이 “여주 너 그때 엄청 예쁘고 착했잖아. 나 너 좋아했었어.”라고 말하는 걸 들으며, 내가 정말 당시에 얼마나 내 자신을 수용하고 있지 못했는지, 얼마나 내 색깔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나의 장점을 발현하지 못했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나는 아직 ‘이만하면 충분한 나’의 완성 단계의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했지만(완성의 경지라는 게 있을까?), 예전에 비해 생각이 좀 달라진 것 같기는 하다. 아직 너무 부족하니 이만큼 훌륭한 교수가 되어야 하고, 이만큼 강의를 잘 해야 하고, 이만큼 상담 성과가 좋아야 하고... 등의 생각을 가지고 무언가를 열심히 하려는 생각은 없어졌다. 그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내가 가지고 있는 힘과 약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내 안에 어떤 색깔을 숨기고 있는지, 어떤 씨앗이 더 자라날 수 있는 사람인지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계속해서 새로운 내 색깔, 씨앗, 또는 약점들이 발견될 때마다 ‘아 그래. 내가 이런 사람이구나. 이 색깔은 내 색깔 같은데 이런 저런 이유로 많이 흐려졌구나. 이런 점 때문에 내가 힘들었구나. 와우, 나한테도 이런 씨앗이 있었나?’ 등을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는 이렇게 하면 열정이 사라져서 공부도 안하고 노력을 안 하게 될까봐 두려웠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만하면 충분한 나’로 내 자신을 바라보고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더 힘이 생기고 책을 읽는 몰입도도 강해지고 더 짜릿하게 일을 해나갈 수 있었다. 물론 그에 따른 성과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또 굳이 성과가 가시적으로 나오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것 같다.

나의 경험담을 예를 들어 설명했지만, 요새 계속 학생들을 수퍼비전을 하면서 느낀 점도 비슷하다. 많은 상담자들이 수퍼비전 자료를 준비하면서 자기 자신이 못한 부분에 대해 스스로를 마구 비난하고, 수퍼비전에 와서도 무척 괴로워한다. 더 좋은 상담자, 더 훌륭한 상담자(그게 뭐지?)가 되기 위해서 워크샵도 다니고, 훈련도 받고 열심히 노력한다. 그 노력이 의미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자신은 너무나 못난 상담자이기 때문에 열심히 다녀야 한다는 그 말이 안타깝다. 그러한 모습은 내담자에게도 그대로 전달이 된다. 어떻게든 내담자를 변화시키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고 힘쓰면서 상담을 끝나고 나면 기진맥진하게 된다. 한 수퍼바이지가 자기는 상담에서 들은 내용을 절대 잊지 않기 위해서 한 회기가 끝나면 내담자가 얘기한 키워드를 적어서 일주일 동안 달달 외우고 다닌다는 얘기를 듣고 감탄하기도 했다. 물론 그 노력도 의미 있다. 그러나 ‘훌륭한’ 상담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과정에서 진짜 상담자로서의 내 모습을 인식하고 바라보는 기회를 놓치고, 그것이 내담자와 진짜 만남을 방해하지는 않을까 우려스럽다.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원어 ‘나-너’는 오직 온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해질 수 있다. 온 존재에로 모아지고 녹아지는 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너’로 인하여 ‘나’가 된다. ‘나’가 되면서 ‘나’는 ‘너’라고 말한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다.

마르틴 부버 <나와너> 中 -

이러한 참만남은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참만남을 위해 필요한 것은 결국 ‘이만하면 충분한 나’를 수용하고, 내담자와의 만남 속에서 내 자신의 모습을 다시 더 뚜렷하게 해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혹시 나는 상담자로서 나에게 맞지도 않은 ‘유명 슈퍼히어로 디자인에 번쩍번쩍 빛이 나는 신발’을 신고, 그 신발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추려다 내가 너무 부족하다고 자책하고 난 안된다고 좌절하고 있고 것은 아닐까? 지금 내 발에 맞는 꼭 맞는 신발이 나를 가장 잘 달릴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말이다. 다가오는 새 봄. 내 발의 모양을 잘 살펴보고, 가볍고 편한 내 발에 딱 맞는 신발을 신고 달리며, ‘이만하면 충분한 나’를 맞이해 보았으면 좋겠다.

정여주 교수

(사)한국상담학회 자격검정위원장

한국교원대학교 교육학과 상담심리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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